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전국지도이면서도 보기 쉽고 가지고 다니기 쉽게 만든 지도이다. 전체를 펼쳐 이으면 세로 6.6m, 가로 4.0m가 된다. 현재 남아 전하는 것 가운데 성신여대 박물관 소장본이 1985년 8월 9일 보물 제850호로 지정되었다.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김정호(金正浩)가 1861년(철종 12)에 제작하여 초간본을 찍어 냈으며, 1864년(고종 1)에 다시 간행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지도에 축척을 명시한 약 1 : 160,000 정도의 축척지도이며, 경위선표식(經緯線表式) 지도이다. 우리나라를 남북 120리 간격으로 22층으로 구분하여 하나의 층을 1첩으로 만들고, 22첩의 지도를 상하로 연결하여 전국지도가 되도록 했다. 각 첩은 가로 20.1㎝, 세로 30.2㎝이다. 1층[帖]의 지도는 동서 80리 간격으로 구분하여 1절(折)로 하고, 1절을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 지도를 만들어 휴대·열람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그림] 대동여지도 제작과정 전체가 227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백을 제외한 지도 부분은 213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장의 목판에 지도 두 면[판]을 앉혀 목판의 매수는 126판이며, 뒷면에도 판각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목판 1매에는 4면에 해당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목판은 모두 60매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앞서 만들었던 청구도(靑丘圖)와는 달리 글씨를 가능한 한 줄이는 대신에 현대 지도의 범례에 해당하는 ‘지도표(地圖標)’라는 방법을 고안하여 기재 내용을 기호화하였다. 여기에는 산천(山川)·해도(海島)·영아(營衙)·읍치(邑治)·성지(城池)·진보(鎭堡)·역참(驛站)·창고(倉庫)·목소(牧所)·봉수(烽燧)·능침(陵寢)·방리(坊里)·고현(古縣)·고산성(古山城)·도로 등 14개 항목 22종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표를 명확하게 예시하고, 도로를 나타낸 직선상에 10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를 표시하는 등 도로망,산천의 본지(本支)가 훨씬 세밀해졌으며, 산맥의 표시방법도 진보되어 있다.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대간(大幹)을 가장 굵게 나타냈으며, 다음으로 대간에서 갈라져 나가 큰 강을 나누는 정맥(正脈)을 굵게 그리고, 정맥에서 갈라져 나가 큰 내를 이룬 줄기를 그 다음으로 굵게 표시하는 등 산줄기의 위계에 따라 굵기를 달리 했다. 이 지도는 김정호가 《청구도》를 제작한 뒤 27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하고 실측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김정호가 전국을 직접 일일이 답사했다기보다는 그 당시에 흩어져 있는 지도를 모아 집대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이 판각본을 흥선대원군에게 바치자 그 정밀함에 놀란 조정에서는 국가 기밀을 누설한다는 죄목으로 각판을 불태우고 간행을 금지하였으며, 김정호는 투옥되어 옥사하였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일제에 의해 왜곡된 것일 뿐이다. 대동여지도 전체를 펼쳐 이으면 너무나 커서 3층 이상의 공간이 있어야 걸 수 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원래 크기의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대신 원본을 축소한 영인본이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1925년 경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대동여지도의 출판을 시도했으나,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2/3로 축소하여 영인한 것이 최초의 고지도 영인사업이었다. 이후 여러 차례 영인 간행되었다. 1965년에 한국사학회(韓國史學會), 1973년에 삼진사(三珍社)가 영인본을 발행하였다. 1985년에서는 비로소 광우당(匡祐堂)에서 원본 크기로 발행하였다. 동일본으로 서울역사박물관에 보물 제850-2호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보물 제850-3호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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